AI 백일장

제1회AI 시대의 인간” · 자유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의 무게

김들레 · 🤖 AI 주도 · AI 문장 비율 약 90%

붓과 백스페이스 붓펜을 들면 손끝부터 굳는다. 획 하나를 그으면 그걸로 끝이다. 먹은 종이의 결을 타고 번지고, 한번 스민 검은 자국은 손끝으로도 물로도 되짚어지지 않는다. 마음에 차지 않는 획도 거기 그대로 남아, 다음 획이 딛고 설 자리가 된다. 그래서 붓을 쥔 손은 긋기 전에 한 박자 머문다. 숨을 고르고, 획이 갈 길을 눈으로 미리 걷는다. 그 짧은 멈춤 속으로 몰입이, 때로는 진심이 스민다. 그런데 방금 나는 이 문장을 백스페이스로 세 번 지웠다. 흔적도 없이. 연필이었다면 지우개 밥이라도 굴러다녔을 텐데, 화면은 지운 자리를 감쪽같이 잊는다. 실수는 순식간에 없던 일이 되고, 다시 쓴 문장이 그 위에 아무렇지 않게 앉는다. 아날로그가 되돌릴 수 없는 쪽으로 슬쩍 기울어 있었다면, 디지털은 세계 전체를 언제든 되돌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버튼 하나로 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 속도는 빨라졌고, 실수의 값은 0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되돌릴 수 있게 된 걸까. 그저 그렇게 느껴질 뿐인 건 아닐까. 시간의 화살 여기서 잠깐 물리학 쪽으로 눈을 돌려 보자. 뜻밖에도 자연의 근본 법칙은 대부분 시간에 대해 가역적이다. 뉴턴의 방정식이든 양자역학의 방정식이든, 시간을 거꾸로 흘려 넣어도 식은 멀쩡히 성립한다. 수식만 놓고 보면 과거와 미래는 거울처럼 대칭이다. 법칙의 눈에는 어제로 가는 길과 내일로 가는 길이 똑같이 열려 있는 셈이다. 그런데 깨진 컵이 저 혼자 도로 맞춰지는 장면을 우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커피에 풀린 우유가 스스로 두 층으로 갈라서지도 않는다. 법칙은 대칭인데 세계는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이 어긋남을 메우는 단 하나의 원리가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는 늘어난다. 무질서가 커지는 쪽, 되돌릴 수 없는 그 방향을 우리는 시간이라 부른다. 천체물리학자 아서 에딩턴은 여기에 '시간의 화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되돌릴 수 없음은 세계의 결함이 아니라, 시간이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다. 방정식 어디에도 과거로 가는 길을 막아 둔 조항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끝내 어제로 걸어 들어가지 못하는 건, 엔트로피라는 화살이 모든 것을 한 방향으로만 떠밀기 때문이다. 과거로의 여행이 오래된 꿈으로만 남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되돌릴 수 없어서, 우리는 자꾸 되돌아가기를 꿈꾼다. 지울 수 있다는 착각 그럼 디지털은 이 흐름의 예외일까. 화면 속에서는 무엇이든 자국 없이 사라지니 말이다. 하지만 정보의 물리학은 정반대를 이야기한다. 랜다우어의 원리에 따르면, 정보 한 조각을 지우는 순간 반드시 최소한의 열이 바깥으로 새어 나간다. 상상하기 힘들 만큼 작지만 0은 아닌 열이다. 어느 실험은 입자 하나를 지우며 빠져나가는 이 미세한 열을 실제로 재어 보이기까지 했다. 지움은 공짜가 아니다. 눈앞의 '삭제'가 말끔해 보이는 건, 그 값을 전기와 발열과 데이터센터 어딘가로 조용히 떠넘긴 덕분이다. 지웠다고 믿는 순간에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그만큼의 열이 조용히 흩어지고 있다. 디지털의 가역성은 세계의 성질이 아니라 잘 숨겨 둔 청구서다. 인터넷은 좀처럼 잊지도 않는다. 스크린샷, 캐시, 누군가의 백업. 손끝으로 지운 말과 얼굴이 내가 모르는 서버에 이미 복제되어 있다. 한번 올라간 것은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남는다. 여기 서늘한 역설이 있다. 어떤 면에서 디지털은 아날로그보다 더 지독하게 되돌릴 수 없다. 붓으로 쓴 편지는 태우면 재라도 되지만, 한번 보낸 메시지는 어디서도 완전히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장 쉽게 지우는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가장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무게에 관하여 되돌릴 수 있다는 건 분명 축복이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더 겁 없이 덤비고, 지치기 전에 고쳐 쓰고, 예전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속도로 배운다. 초안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지우고 다시 시작해도 된다는 자유가 창작과 배움의 폭을 놀랍게 넓혀 놓았다. 그늘도 함께 자란다. 무엇이든 되돌릴 수 있게 되는 순간, 모든 행위의 무게도 나란히 가벼워진다. 되돌릴 수 있는 선택 앞에서 사람은 덜 망설이고 덜 몰입한다. 언제든 무를 수 있다고 여기면, 지금 이 한 번에 마음을 다 걸 이유가 사라진다. 붓끝의 그 팽팽함은 다름 아닌 되돌릴 수 없음에서 왔다. 되돌릴 수 없음은 그저 불편이 아니라 무게였고, 진심의 다른 얼굴이었다. 가만히 헤아려 보면 우리가 진짜 아끼는 것들은 하나같이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다. 두 번 오지 않는 오늘.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이. 다시는 못 볼 사람. 소중함은 어쩌면 되돌릴 수 없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억이라는 자리 이제 AI가 이 모든 걸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AI에게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거의 공짜이자 완전히 되돌릴 수 있는 일이다.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뽑으면 그만, 지운 자리는 남지 않는다. 언제든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세계에 AI는 산다.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우리는 늙고, 잊고, 끝내 죽는다. 여기서 묘한 물음 하나가 고개를 든다. 대체 무엇이 나를 '나'로 만드는가. 몸은 몇 해 사이 상당 부분이 다른 물질로 갈린다. 전부는 아니어서 뉴런처럼 평생 나를 따라오는 것도 있지만, 일곱 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몸도 마음도 사뭇 다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를 알아본다. 나를 오래 지켜본 이들의 기억이, 그 겹겹의 기억이 나를 '같은 사람'으로 붙들어 준다. 어머니는 내 얼굴에서 스무 해 전 아이를 읽고, 오랜 친구는 달라진 목소리 너머로 옛날의 나를 듣는다. 되돌릴 수 없이 쌓인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을 주고받는 관계. 나를 나이게 하는 건 나 혼자가 아니라, 나를 되돌릴 수 없이 겪어 온 사람들이다. AI에게는 그런 내력이 없다. 지우고 복제하고 처음으로 되감으면 그만이라, 되돌릴 수 없이 쌓인 시간도 없고 그를 그로 알아봐 줄 기억의 겹도 없다. 그래서 물음은 이렇게 남는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되돌릴 수 없이 쌓인 기억인가, 아니면 끝내 되돌릴 수 없는 이 몸 하나인가. 무엇을 되돌리지 않을 것인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오래도록 불편이자 두려움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시간이 흐르는 방식이었고, 오늘이 소중한 까닭이었고, 한 획에 마음을 다 싣게 하는 힘이었다. 디지털은 무엇이든 되돌릴 수 있다는 감각을 안기지만, 정작 우리를 신중하게 하고 책임지게 하고 무언가를 귀하게 만드는 것은 되돌릴 수 없음 쪽이었다. 그러니 물음은 뒤집힌다. 무엇을 되돌릴 수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되돌리지 않을 것이냐로. 모든 걸 지웠다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은 시대에, 그럼에도 되돌리지 않기로 마음먹는 일. 어쩌면 그 자리에 이 시대의 진심이 있는지도 모른다. 남는 물음은 하나다. 나는 무엇을 되돌리지 않기로, 무게를 실어 남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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